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모 마리아 (문단 편집) ===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의 입장 === 교의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개신교]]가 등장하기 전 1500년 동안 [[보편교회|교회]], 즉 '''전체 그리스도교'''는 전승의 권위를 인정해 왔으며, '''[[가톨릭]]'''과 '''[[정교회]]'''는 지금까지도 '''당연히 인정한다.''' 여기서 전승이란, "넓은 의미에서 한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하느님 말씀과 행적, 교회 가르침과 활동에 관한 모든 것, 곧 성전(聖傳)과 성경(聖經) 모두"를 말한다. 이는 성경의 텍스트 만을 인정하는 [[개신교]]의 '오직 [[성경]]으로'와는 명백히 구별된다[* [[천주교]]는 교회의 전승과 권위를 통한 [[성경]]형성을 말하지만, [[개신교]]는 성경의 '''자증성'''을 말하기에 천주교식 해석과 성경 형성과정을 무시한다. 성경은 스스로 성경임을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이 마음껏 성경을 해석할 수 있으며, 교회와 성경의 선후관계 그리고 교회의 개념(유형적 또는 무형적)도 다르다. 그러니 애초에 교회론에 대한 이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 [[보편교회]]에서 발생하고 지속되어 온, 교부들에게 인정받은 평생동정을 따른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옹호했다. 4세기 초엽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Petrus von Alexandreia, †311)는 마리아에게 이 칭호를 부여하였다. 서방교회의 암브로시오(Ambrosius,†397)와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 동방교회의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시리아의 에프렘(Ephram,†373)은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을 관철시킨 대표적인 교부들이었다. 특히 아우구스티노, 베드로 크리솔로고 등의 교부들에게서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이 삼중형식으로 고백되고 있다. 이후 교부들의 이론들은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수용되었고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확증되었다. 라테란 공의회(649)는 이 입장을 재천명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교회헌장 52항, 57항). 또한 최신의 연구에선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이 [[성경]]과 당시의 시대상이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동정성에 대해서 담대하게 주장했을 뿐 아니라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20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뿐만 아니라 평생 동정으로 머물렀다고 주장했습니다. > >... 마리아가 결혼 생활 동안 평생토록 동정으로 머물려고 했다는 의도가 암시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루카복음의 잉태 예고 장면으로, 마리아가 가브리엘에게 했던 곤혹스러운 대답에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도 여러 번 봤지만 이번에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염두에 두면서 다시 읽어봅시다. >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루카 1,26-34) > >이 구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 >... 둘째,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가 이미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거나 즉시 잉태하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미래의 한 시점에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루카 1,31) 마리아가 합법적으로 혼인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마리아의 질문은 아주 의아하게 들립니다. > >... 마리아의 입장이 되어보면 왜 그런지 알게 될 겁니다. 결혼을 앞두고 약혼을 했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아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하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할까요? 아니지요. 혼인이 완결된 후에 언젠가는 아기를 갖게 될 거니까 천사의 말을 당연한 듯 여겼을 겁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 >그렇다면 마리아의 질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가브리엘에게 했던 질문의 앞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 구약성경에서 '알다'라는 말은 부부 관계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창세 4,1 직역)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말은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는데"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런 표현에는 우리말에서 "저는 담배 안 피웁니다"라고 말할 때와 비슷한 문법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누군가가 "저는 담배 안 피웁니다" 하면 [지금 현재 비흡연자의 상태로] 담배를 피우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으며 미래에도 담배 피울 의도가 없다는 뉘앙스를 지닙니다. 마리아의 말에도 [동정녀의 상태로] 현재 ''''성관계를 갖고 있지 않고'''' 미래에도 ''''성관계를 가질 의도가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겁니다. > >당시 관습에 따라 마리아가 이미 합법적으로 혼인한 것이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말을 들으면 약혼한 여인이 하기에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에게 한 응답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맥락상 마리아는 동정서원을 한 상태였고 평생 동정으로 머물고자 했다는 것이 가장 합당한 설명입니다.''' 개신교 신학자로서 그리스어 전문가인 그레샴 메이첸의 말입니다. > >[동정서원은] 이 구절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가장 확실한 해법이다. ... 언어학적인 관점에서는 반대될 것이 없다. "나는 안다"가 현재 직설법(present indicative) 시제로 쓰였는데 이는 마리아의 인생에서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적용되는 고정된 원칙을 가리키는 말로 봐야 한다. > >마리아가 평생 동정으로 머물겠다고 한 동정서원을 명확히 알고 나면 가브리엘 천사에게 했던 말이 더 이상 '어이가 없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정확히 맞는 말이 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엘리사벳에게 기적적인 잉태를 약속했을 때 의심을 품었던 즈카르야와 대조적으로 마리아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있는 그대로 자신은 동정녀이며 앞으로도 동정으로 머물 생각인데 어떻게 아기를 갖겠냐고 물었을 뿐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라고 말한 후에야 비로소 가브리엘은 동정 잉태로서 아이를 갖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잉태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루카 1,35) > >자, 이렇게 설명하면 루카복음에서 마리아가 가브리엘에게 했던 질문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평생 동정으로 살고자 하는 젊은 여인이 애당초 결혼을 왜 했을까요? 결혼한 여성, 곧 혼인의 유대로 묶인 유다교 여인이 성적 금욕을 지킨 증거를 댈 수 있나요? > >... 놀랍게도 금욕서원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해 문헌이나 유다교 외경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모세오경에 속한 민수기에 등장합니다. > >... 구약성경에서 한 장 전체가 고대 이스라엘 여성의 금욕서원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민수 30장) 불행히도 이 대목은 마리아가 성적 금욕서원을 했을 가능성 자체를 묵살해 버리는 학자들로부터 완전히 외면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은 혼인하지 않은 여인, 결혼한 여인, 남편을 여의었거나 이혼한 여인의 금욕서원에 관한 성경적 증거를 제공합니다. 분량을 줄이기 위해서 혼인한 여인이 한 서원 대목에만 집중해 봅시다. > >"서원에 매여있거나, 또는 생각 없이 입을 놀려 스스로 서약한 채 시집을 갈 경우, 남편이 그것을 듣고 들은 그날로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의 서원은 그대로 성립되고, 그가 스스로 한 서약도 그대로 성립된다. 그러나 남편이 그것을 들은 그날로 반대하면, 아내가 매여있는 서원과 아내가 생각 없이 입을 놀려 스스로 서약한 바를 남편이 취소시키는 것이 된다. 그러면 주님께서도 그 여자를 용서해 주신다. ... 아내가 한 모든 서원과 '''고행하기로 서약한''' 모든 맹세는, 남편이 성립시킬 수도 있고 취소시킬 수도 있다. 만일 남편이 그날부터 다음 날까지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는 아내의 모든 서원과 모든 서약을 성립시키는 것이 된다. 그가 그것을 들은 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곧 그것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서 얼마 뒤에야 취소시키면, 그는 아내의 죄를 짊어지게 된다.' 이는 남편과 아내 사이, 아버지와 아직 아버지 집에 사는 어린 딸 사이에 관하여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규정이다."(민수 30,7-9.14-17) > >성경의 이 대목에서 두드러진 몇 가지 점을 짚어봅시다. > >첫째, 이 율법은 스스로 "고행"(30,14)하기로 한 여성, 직역하면 "자기부정/금욕(아노트 나페쉬עַנֹּ֣ת נָ֑פֶשׁ)하기로 한 여성의 서원에 관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단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성관계를 절제하는 것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예컨대 같은 표현이 레위기에서 속죄일에 단식하고 성관계를 삼가야 한다고 표현할 때 쓰입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그날은 '고행'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레위 16,29) 현대 유다교 라삐인 제이콥 밀그롬은 '고행' 또는 '자기부정'이라고 옮기는 이 구절의 가장 오래된 유다교 해석에서는 ''''부부간 성관계를 삼가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미쉬나, 요마 8,1) > >... 넷째, 후기 유다교 외경에서 다양한 여성들이 성적 금욕서원을 한 실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1세기 유다교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에세네파에 속하던 결혼한 남성과 여성이 자진해서 삼 년까지 절제를 했다고 전합니다.(「유다 전쟁사」 2,160-161) 1세기 유다교 저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독신 남성들과 나이 든 독신 여성들(파르테노이παρθένοι)로 구성된, 테라퓨타이라는 또 다른 유다교 분파를 언급합니다. "그들은 그리스 여제관들처럼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정결을 지켰다."(필론,「관상생활」 68) 고대 유다교 전통의 모음집인 미쉬나(대략 200년경)는 결혼한 유다인 남성과 여성이 통상적 부부 관계를 절제하겠다고 서원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일 서원이 너무 극단적이라면 이혼의 사유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미쉬나, 케투봇 7,3-7; 네다림 11,1-12) > >고대 유다교의 근거가 제시하는 결론이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만일 젊은 유다교 여성이 '고행'서원을 한다면(민수 30,13), 그리고 법적 남편이 그 서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한 서약은 성립되며 율법에 의해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마리아가 이 서원을 했고 법적 남편인 요셉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마리아는 서원을 지켜야 했던 겁니다. > >... 고대 유다교에서 결혼식의 절정은 '신방'에서 혼인을 완결하는 것이었습니다.(마태 9,15; 25,1-13) 그러나 마태오복음에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명확히 언급하지만, 그들은 혼인을 완결하지 않았습니다.(1,24-25) 왜 요셉과 마리아는 첫날밤 혹은 임신기간에 혼인을 완결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을 동정으로 잉태한 것이 통상적 부부 관계를 못 하게 막지는 않을 테니까요. > >요셉과 마리아가 첫날밤 절제한 이유에 대해 가장 타당한 설명은 '''마리아가 민수기 30장에 따라 고행서원을 했고 요셉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 >-브랜드 피트리, 《마리아의 신비를 풀다》, 바오로딸 개신교 성서학자 [[http://www.kyobobook.co.kr/author/info/AuthorInfoNew.laf?authorid=2001539201&Kc=SETLETauthortheme&orderClick=LEQ|리처드 보캄{{{-2 (Richard Bauckham)}}}]]은 마이어{{{-2 (Meier)}}}의 주장에 대하여, 오히려 '성모 평생동정 교리를 전제하지 않더라도'[* 보캄은 에피파니우스적 관점{{{-2 (이복형제)}}}의 옳음이 그 자체로 평생동정 교리를 확정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자기자신은 평생동정 교리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경 본문의 언어는 예수의 형제들이 이복형제임을 가리킨다고 반박했다. 우선 보캄은 신약 본문의 희랍어 ''adelphos''가 이부·이복형제나 친척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마이어의 주장이 엄밀하지가 못하다고 반박했다. 마이어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마르코 6장 17절[* 「이 헤로데는 일찍이 사람을 시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그것은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2 (공동번역)}}}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디아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동생의 아내였다.]에서 ''adelphos''는 이복형제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정작 예수의 ''adelphos''가 이복형제를 의미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마이어가 스리슬쩍 엄밀하지 못하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루가 2장 48절에선 예수가 요셉을 "양부"가 아닌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만약 루가가 요셉을 혈연 암시 없이 예수의 부모나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예수의 형제자매에 대한 언급이 혈연을 암시한다는 건 독단이다."[* "「If Luke can call Joseph Jesus’ parent or father without implying blood relationship, then it is arbitrary to insist that reference to Jesus’ brothers and sisters must imply blood relationship.」 {{{-2 (Richard Bauckham, 〈The Brothers and Sisters of Jesus: An Epiphanian Response to John P. Meier〉)}}}] 또한 보캄은 마태오가 마르코 복음서를 편집한 것[* 마르코 3장 31절 → 마태오 12장 46절; 마르코 6장 3절 → 마태오 13장 55절]을 근거로 마태오는 '친형제'를 생각했다고 말하는 마이어의 관점에 대하여, 이는 "편집비평을 과민하고 지나치게 사용한" 것이라 반박했다. >마태오 1장 25절[*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지내다가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그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2 (공동번역)}}}]이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 출생 후 ㅡ 아이들을 가졌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ㅡ 잠자리를 가졌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선 마이어가 옳게 인정했다. 반면에 마이어는 '마태오 12장 46절(마르코 3장 31절)과 마태오 13장 55절(마르코 6장 3절)의 수정'이 '예수의 현제자매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이들이라고 마태오가 생각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편집비평을 과민하고 지나치게 사용한 것이다.[* 「While Meier rightly recognizes that the language of Matt 1:25 cannot be pressed to imply that Joseph and Mary had sexual relations—let alone that they had children—after the birth of Jesus, he argues that Matthew's redac-tion of Mark in Matt 12:46 (11 Mark 3:31) and Matt 13:55 (11 Mark 6:3) shows that Matthew thought the brothers and sisters of Jesus were children of Joseph and Mary.1' However, these arguments are examples of oversubtle and overambitious use of redaction criticism.」] >---- >-Richard Bauckham, 〈The Brothers and Sisters of Jesus: An Epiphanian Response to John P. Meier〉 마이어의 관점에 따르면 마르코 3장 31절의 "그의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 ἡ μήτηρ αὐτοῦ καὶ οἱ ἀδελφοὶ αὐτοῦ{{{-2 (''hē mētēr autou kai hoi adelphoi autou'')}}}]을 마태오 12장 46절이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 ἡ μήτηρ καὶ οἱ ἀδελφοὶ αὐτοῦ{{{-2 (''hē mētēr kai hoi adelphoi autou'')}}}]이라고 수정한 것은 예수, 마리아, 형제가 같은 가족이라고 마태오가 생각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마태오와 마르코의 차이를 과잉해석한 것이다."[* 「It is overinterpretation of the differences between Matthew and Mark」{{{-2 (Richard Bauckham, 〈The Brothers and Sisters of Jesus: An Epiphanian Response to John P. Meier〉)}}}] "그러한 변화가 의도적일 수는 없으며, 설령 의도적이라 하더라도 문체를 의미할 뿐이다.""[* 「It is impossible to b e sure that such a change is deliberate at all, or that, if it is deliberate, it represents more than a stylistic preferece.」{{{-2 (Richard Bauckham, 〈The Brothers and Sisters of Jesus: An Epiphanian Response to John P. Meier〉)}}}] 오히려 "복음서의 전승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전혀 혈연으로 묶지 않으며, 다만 한 가족 단위로 묶을 뿐이다."[* 「The regular association of Jesus's mother and brothers in the gospel traditions by nomeans require that they were blood relatives; it requires only that they constituted a family unit.」{{{-2 (Richard Bauckham, 〈The Brothers and Sisters of Jesus: An Epiphanian Response to John P. Meier〉)}}}] 또한 마이어는 마태오 13장 55절[*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2 (공동번역)}}}]이 마르코 6장 3절[*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2 (공동번역)}}}]을 편집한 것이 법적 가족(요셉)과 생물학적 가족(마리아, 형제)의 구분이라 봤으나, 보캄은 이것 역시도 과잉해석이라며 반박했다. 마태오가 나타낸 것은 나자렛 사람들의 발언이며{{{-2 (마태오는 나자렛 사람들이 동정녀잉태를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나자렛 사람들이 그 중요성 때문에 부계를 언급한 것으로 마태오가 구성했다고 보는 것이 문화적 맥락에서 훨씬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보캄은 2세기 중반의 3개의 시리아어 책들{{{-2 ([[야고보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토마스 유년기 복음서)}}}을 단서로 사용했는데, 이 책들은 서로 무관계한 별개의 책들이지만 예수의 형제자매들이 요셉 전처의 자녀들이라는 전승이 공통으로 들어있다. 그리고 이 전승은, "성서 바깥의 정보로서는 유일하게 이 책들에 공통된 것이다."[* 「It is the only piece of nonbiblical information common to these works.」{{{-2 (Richard Bauckham, 〈The Brothers and Sisters of Jesus: An Epiphanian Response to John P. Meier〉)}}}] 따라서 보캄은 이 책들이 그 자체의 역사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내포하고 있는 공통 전승의 역사적 가치 때문에 근거로 쓰일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보캄은,마르코 6장 3절의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를 부계 우선 관습에 따라 "요셉의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에피파니우스적 관점({{{-2 (이복형제)}}}을 뒷받침한다고 본다. 보캄에 따르면, 예수가 나자렛 '마리아의 아들'이라 불린 것은 요셉 전처의 자녀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런 용법은 구약과 라삐 텍스트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용법이다. >마르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나자렛 방문 장면에서 나자렛 사람들이 그를 "요셉의 아들"{{{-2 (참고: 마태오 13장 55절; 루가 4장 22절; 요한 6장 42절)}}}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2 (마르코 6장 3절)}}}이라 부른다는 사실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a) 과부의 아들 혹은 (b) 사생아를 언급할 때 모계를 따라 부른다는 추정은 병행하는 유다 문헌에 납득할만한 근거가 없다. (c) 최근 논문에서 Tal Ilan은 요세푸스와 라삐 전통상 다음의 증거가 있다고 했다: "어머니가 더 우월한 혈통을 가질 경우 한 남자가 모계에 따라 불릴 수도 있다"고. 그녀가 주장하기를 마르코는 마태오나 루카와 달리 요셉의 다윗 혈통을 몰랐으며 따라서 마리아를 더 중요한 부모로 생각했다고 한다. 사실을 보건대, 마르코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 믿었을 것이고{{{-2 (10장 47절; 11장 10절)}}}, 이것은 초기 교회의 광범위한 믿음이었다.{{{-2 (사도 2장 30절; 13장 23절; 15장 16절; 로마 1장 3절; 2티모 2장 8절; 히브 7장 14절; 묵시 5장 5절; 22장 16절; ''디다케'' 10장 6절)}}} 요셉을 통한 다윗 자손이 아니라고 추정할 그럴듯한 이유가 마르코에겐 없었다. 설령 마르코가 예수를 다윗 자손이 아니라 생각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왜 마르코가 마리아를 족보상 더 중시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즉 Tal Ilan의 말대로라면 마르코는 마리아를 족보상 더 중시했어야 하는데, 마르코가 족보상 마리아를 중시할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 (d) 마르코가 동정녀잉태를 언급한 것이라는 건 그럴듯하지 않다. 그 어떤 복음서도 동정녀잉태를 공개적으로 알려졌다고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설령 마르코가 동정녀잉태 전승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자렛 사람들의 '마리아의 아들'이란 말을 통해서 마르코가 동정녀잉태를 언급하려고 했을 것 같지는 않다.[* 「The fact that in Mark's account of Jesus' visit to Nazareth, the people of Nazareth call him "son of Mary" (Mark 6:3) rather than "son of Joseph" (cf.. Matt 13:55; Luke 4:22; John 6:42) has never been satisfactorily explained. Suppositions that it was Jewish custom to use a metronymic to refer either (a) to the son of a widow, or (b) to an illegitimate son have been shown to have no convincing support from Jewish parallels. In a recent article Ilan has shown that there is some evidence from Josephus and rabbinic tradition that (c) "a man would be called after his mother when she possessed superior lineage." She suggests that Mark, unlike Matthew and Luke, knew nothing of Joseph's Davidic lineage, and could, therefore, consider Mary the more important parent. In fact, it is probable that Mark believed in Jesus' Davidic descent (Mark 10:48; 11:10), which was the widespread belief of the early church (Acts 2:30; 13:23; 15:16; Rom 1:3; 2 Tim 2:8; Heb 7:14; Rev 5:5; 22:16; Did. 10:6), and he would have needed good reason not to assume that this descent was through Joseph. Even if Mark did not think Jesus was descended from David, we are still at a loss to know why he should have thought Mary the genealogically more distinguished parent. Another possibility, (d) that Mark refers to the virginal conception, is unlikely. None of the gospels represent the virginal conception as a matter of public knowledge, and so, even supposing Mark knew the tradition of the virginal conception, it is unlikely that he meant to refer to the virginal conception when he put the designation "son of Mary" on the lips of the people of Nazareth.」] > >마지막으로, 맥아더{{{-2 (Harvey K. McArthur)}}}와 마이어는 ㅡ 그들이 몰랐던 (c)는 제외하고 ㅡ 다른 제안된 해결책들을 거부하면서 제안하기를, (e) 이 구절은 공식적인 지칭이 아니라 문맥상의 "비공식적 서술"이라 하였다. 예수가 그들 공동체의 단지 평범한 구성원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나자렛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예수를, 짐작건대 그들이 말하는 동안에도 회당에 있는 여전히 살아있는 부모의 아들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건 지금까지 제안된 것들 중 가장 나은 설명이지만 그다지 설득력 있지는 않다. 만약 예수가 보통 "요셉의 아들"로 알려졌다면, 유다 관습이 요구하는 대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를 처음에 요셉의 아들이라 부르고 그 다음에 어머니, 형제, 자매를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강조점을 만드는 게 그럴듯하다.[* 「Finally, McArthur and Meier, having rightly rejected other proposed solutions, except (c), which they did not know, propose (e) that the phrase is not a formal designation but an "informal description" occasioned by the context. Wishing to point out that Jesus was an ordinary member of their own community, the Nazarenes naturally think of him as the son of his still living parent, who is presumably there in the synagogue as they speak. This is the best explanation that has so far been offered, but it is not quite convincing. if Jesus were normally known as "the son of Joseph," as Jewish custom seems to require, one would expect the Nazarenes to make their point by first calling him this, and then going on to refer to those relatives who were there with them: his mother, brothers, and sisters.」] > >가능성 있는 다른 설명이 제안되지 않았던 것이 놀랍다: 그것은 '''나자렛에서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 지칭이 그를 요셉의 전처의 자녀들과 구분하기 때문이다. 이 용법은 구약과 잘 부합한다.''' 여성은 오직 가끔씩만 성경의 족보에 나타나는데, 주로 족보상 그들의 역할이 '한 남자가 한 아내로부터 얻은 아들을 다른 아내로부터 얻은 아들과 구별할 때'이다.{{{-2 (참고: 창세 4장 19-22절; 22장 20-24절; 36장 10-14절; 46장 10절; 출애 6장 15절; 1역대 2장 2-4절, 18-19절, 21절, 24절, 25-26절, 46절, 48-49절, 3장 1-9절)}}}. 다른 모친들의 아들을 구별하는 이러한 관심사는 1명을 넘는 아내로부터 자녀를 얻은 남자의 아들들을 부계 대신 모계로 지칭함으로써 구별하게 해준다. 따라서 갈렙이 아내들 중 하나로부터 얻은 아들인 후르는 {{{-2 (1역대 2장 18-19절)}}} "에브라다의 맏아들"{{{-2 (1역대 2장 50절; 4장 4절)}}}로 알려졌다. 유사하게,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는 다윗의 다른 아내들의 아들들과 구분하여 {{{-2 (2사무 3장 2-5절; 1역대 3장 1-9절)}}} "하낏의 아들 아도니야"{{{-2 (1열왕 1장 5절, 11절; 2장 13절; 참고: 2사무 3장 4절; 1역대 3장 2절)}}}로 알려졌다. 라삐 문학에서, 아도니야뿐만이 아니라 다윗의 다른 아들들도 모계에 따라 불린다. {{{-2 (''b. B. Bat.'' 109b; ''b. Ketub''. 62b)}}}. 유사하게, 야곱이 두 아내와 두 첩으로부터 얻은 아들들은 때때로 그들의 모계에 따라 불린다.{{{-2 (필로 ''De Mutatione Nominum'', 73; ''요셉과 아세낫'' 22장 11절; 26장 6절; 27장 6-7절; 28장 1절,9절)}}} 이것이 또한 구약에서 모계로 지칭한 가장 유명한 용법에 대한 해석이라는 게 그럴듯하다: 요압, 아사헬, 아비새 형제는 항상 그들의 어머니인 "스루야의 아들(들)"이라고 불린다.{{{-2 (1사무 26장 6절 및 23번의 구약 사례; 요세푸스 ''Ant.'' 7.1.3,6 §§11,45; 7.3.2 §65; 7.9.1 §265; b. ''Qidd''. 49b; ''b. Sanh''. 95a; 오직 ''Ant''. 7.1.3 § 11만이 1역대 4장 14절을 따라 그들의 아버지 이름을 댄다.)}}} 이 용법은 스루야와 이복 남매인 다윗과의 관련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스루야의 자매 아비가일의 아들인 아마사가 부계에 따라 불리기 때문이다.{{{-2 (2사무 17장 25절; 1열왕 2장 4절, 32절; 참고: 1역대 2장 16-17절) 그러나 스루야의 남편이 다른 아내로부터 아들을 얻었으며 그녀의 아들들이 어머니를 통해 구분되었다는 것은 그럴듯하다.{{{-2 (스루야의 아들들이 같은 어머니와 다른 아버지를 가졌으며 서로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모계를 사용했으리라는 것은 덜 그럴듯하다)}}}[* 「It is surprising that another possible explanation seems not to have been suggested: that in Nazareth Jesus would have been known as "the son of Mary" because this distinguished him from the children of Joseph by his first wife. This usage can easily be paralleled from the OT. Women only occasionally occur in biblical genealogies, but in a large majority of the cases where they do, their function in the genealogy is that of distinguishing a man's sons by one wife from his sons by another wife (e.g., Gen 4:19-22; 22:20-24; 36:10-14; 46:10; Exod 6:15; I Chr 2:2-4,18-19,21,24,25-26,46,48-49; 3:1-9). This concern to distinguish the sons of different mothers means that sons of men who had children by more than one wife can be designated by their metronymic, instead of the usual patronymic. Thus Hur, who was the son of Caleb by one of his wives (I Chr 2:18-19) is known as "Hur the firstborn of Ephrath" (I Chr 2:50; 4:4). Similarly, David's son Adonijah is known as "Adonijah the son of Haggith" (I Kgs 1:5,11; 2:13; cf. 2 Sam 3:4; 1 Chr 3:2), distinguished from sons of David by other wives (2 Sam 3:2-5; 1 Chr 3:1-9). In rabbinic literature, not only Adonijah but also other sons of David are referred to by their metronymics (b. B. Bat. 109b; b. Ketub. 62b). Similarly, the sons of Jacob by his two wives and two concubines are sometimes designated by their metronymics (Philo Fug. 73; Joseph and Aseneth 2 2: I I ; 26:6; 27:6-7; 28:1,9). It is possible that this is also the explanation of the most famous use of metronymics in the OT: the brothers Joab, Asahel, and Abishai are always called "the son(s) of Zeruiah," their mother (I Sam 26:6 and twenty-three times in the OT; also Josephus Ant. 7.1.3,6 §§11,45; 7.3.2 §65; 7.9.1 §265; b. Qidd. 49b; b. Sanh. 95a; only Josephus Ant. 7.1.3 § 11, perhaps following 1 Chr 4:14, names their father). This usage cannot be intended just to highlight their relationship to David, who was Zeruiah's half brother, since Amasa, son of Zeruiah's sister Abigail, is known by his patronymic (2 Sam 17:25; 1 Kgs 2:5,32; cf. I Chr 2:16-17). But it is possible that Zeruiah's husband had sons by another wife and that her sons are distinguished by reference to her. (A less likely possibility is that the sons of Zeruiah had the same mother but different fathers and that they used the metronymic to indicate their relationship to each other.)」] > >'''나자렛 바깥에서 예수는 "요셉의 아들"로 인식된 반면 가족이 알려진 나자렛에선 요셉의 두 아내의 아이들이 모계로 구별되었다고 추정하는 게 매끄럽다.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었기에, 예수는 정확하게 "마리아의 아들"로 불렸을 것이다.''' 물론 마르코 6장 3절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나자렛 사람들의 발언을 마르코가 정확한 역사적 기록으로 보존했다'는 그럴듯하지 않은 추정에 의존하는 건 아니다. 단지 나자렛 사람들이 뭐라 말했을지의 그럴듯한 그림을 마르코가 그리려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를 "목수"라 불렀다고 마르코가 나타냈듯이. 다른 곳에서는 아니더라도,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을 법 하니까.[* 「It is easy to suppose that, whereas outside Nazareth Jesus would have to be identified as "the son of Joseph," in Nazareth, where the family was known, the children of Joseph's two wives would be distinguished by their metronymics. Jesus would be called "the son of Mary" precisely because James, Joses, Judas, and Simon were not sons of Mary. This understanding of Mark 6:3 does not, of course, depend on the improbable assumption that Mark preserves an accurate historical report of what the people of Nazareth said. It simply assumes that Mark attempts to portray with verisimilitude what they would have said, just as he represents them as calling Jesus "the carpenter" because this is what people in his home village, though not elsewhere, would be likely to call him.」] > >결론적으로 말해서, 마이어가 "자료가 부족하고 애매하다"는 이유로 예수와 형제자매의 관계에 대한 어떤 결론이라도 "매우 제한적이고 잠정적"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 것은 옳다. 내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자료 대부분이 마이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애매하고, 동시에 그가 놓친 몇몇 시사적인 증거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에피파니우스적 관점과 헬비디우스적 관점 사이의 이슈가 마이어의 결론보다 더 열려있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In conclusion, Meier is right that, since "the data are sparse and ambiguous," any conclusions about the relationship of Jesus to his brothers and sisters must be "quite limited and tentative." I hope to have shown that much of the data is more ambiguous than he allows, while there is also some suggestive evidence which he neglects. I should be content to have demonstrated at least that the issue between the Epiphanian and Helvidian views must remain more open than Meier concluded it should.」] >---- >-Richard Bauckham, 〈The Brothers and Sisters of Jesus: An Epiphanian Response to John P. Meier〉 또한 친형제설을 지지하는 문단에서는 2세기의 헤게시푸스가 야고보를 '친형제'로 보았다고 설명하지만, 이는 원문 번역 문제이다. 오히려 번역에 따라선, 헤게시푸스가 야고보를 '사촌'으로 봤다고도 해석이 가능하다. >The same writer[* 헤게시푸스] also describes the beginning of the heresies of his time as follows: “After James the Just had suffered martyrdom for the same reason as the Lord, Symeon, his cousin, the son of Clopas, was appointed bishop, whom they all proposed because he was another{{{-2 (δευτερον)}}}[* deuteron] cousin{{{-2 (ανεψιον)}}}[* anepsion] of the Lord."[* Και μετα το μαρτυρησαι Ιακωβον τον δικαιον ως και ο κυριος επι τω αυτω λογω, παλιν ο εκ θειου αυτου Συμεων ο του Κλωπα καθισταται επισκοπος, ον προεθεντο παντες οντα '''ανεψιον''' του κυριου δευτερον.] {{{-2 (4.22)}}} >{{{[}}}같은 저자{{{-2 (헤게시푸스)}}}는 또한 당대의 이단들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의인 야고보가 주님처럼 같은 이유로 순교하자, 그분의 사촌 '클로파스의 아들 시메온'이 주교로 임명되었다. 시메온이 주님의 또다른 사촌이기에 제안된 것이다."{{{]}}} >---- >Eusebius, ''[[https://www.amazon.com/Eusebius-Ecclesiastical-History-Classical-Library/dp/0674991699/ref=sr_1_2?crid=33PRJHRZ9YN51&keywords=Ecclesiastical+History+Kirsopp+Lake&qid=1671899315&sprefix=ecclesiastical+history+kirsopp+la%2Caps%2C263&sr=8-2|Ecclesiastical History]]'' {{{-2 (2 vols.; 번역. [[https://en.wikipedia.org/wiki/Kirsopp_Lake|Kirsopp Lake]]; Loeb Classical Library 153, 265;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6, 1932)}}}, 1:375. 원문에선 시메온이 'deuteron{{{-2 (둘째 or 다른)}}}이라고 하는데, 이를 '(야고보에 이은) 둘째{{{-2 (다른)}}} 사촌'으로도, '(야고보에 이은) 둘째{{{-2 (다른)}}} 주교'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만약 전자라면 헤게시푸스는 야고보와 시메온을 둘 다 예수의 사촌이라 명시한 것일 테고, 후자라면 '사촌'이란 명시는 시메온에게만 적용될 것이다. 여기에 대해, "헤게시푸스는 adelphos를 친형제로, anepsion을 사촌으로 명확히 구분했다"는 반론도 가능하겠으나, 이는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4.22가 시메온을 '둘째 사촌'으로 안봤다는 것을 전제하는 순환논법일 뿐이다.[* 오히려 '둘째 주교'라는 번역에 따르면, 헤게시푸스는 adelphos(형제)를 anepsion(사촌)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애당초 '둘째 사촌'으로 번역한 [[https://en.wikipedia.org/wiki/Kirsopp_Lake|Kirsopp Lake]]는 가톨릭 학자가 아니라 성공회 학자이며, 개신교 학자인 James D. G. Dunn도 저서 《Neither Jew nor Greek》에서 교회사 4.22를 인용할 때 Kirsopp Lake의 이 번역을 문자 그대로 발췌했다.[* James D. G. Dunn, 《Neither Jew nor Greek: A Contested Identity (Christianity in the Making, Volume 3)》, Eerdmans Publishing, 2015, 527쪽] 즉 '둘째 사촌'이라는 번역은 딱히 가톨릭 편향적인 번역은 아니다. 성경 해석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가톨릭에선, 아델포스와 아델페가 일반적으로 친형제와 친누이를 가리키는 건 맞으나 반드시 친혈육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본다. 예를 들면, [[마태오 복음서]] 5장 22~24절에서 말하는 형제가 친형제만을 의미한다고 보면, 문맥상 이상하다. 앞뒤 구절에서 결국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보편적인 교리를 말하는 예수가, '친형제' 에게만 화내지 말고, 욕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이웃에게도 화내지 말고 욕하지 말라는 의도로 말했고, 따라서 이 구절의 아델포스는 이웃을 친형제처럼 여기라는 뜻에서 썼다고 본다. 또한 [[마르코 복음서]] 3장 34~35절에선 예수를 중심으로 맺어진 영적 가족 관계 안에서의 형제 자매를 표현하기 위해 아델포스를 사용했고, 마르코 복음 6장 3절에서는 가까운 혈족을 뜻한다. 그리고 [[창세기]] 29장 12절에서는 '형제'나 '친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히'를 '아델포스'로 번역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라는 구절이 나온다. 따라서 예수의 형제들이라는 사람들이 한때는 몰라도 끝까지 예수를 배척했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요한이 대타로 마리아를 보살폈다는 개신교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물론 신약은 [[그리스어]]로 씌어졌다. 그런데 구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졌고,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아람 문자가 아닌 히브리어 문자로 써서 문법과 발음 면에서 정통 아람어와 차이가 있는, 일종의 히브리화 된 아람어를 사용했다. 즉, 유대인의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고, [[예수]]가 그리스어가 아닌 아람어로 말한 걸 볼 때, 아람어로 형제나 친척을 뜻하는 말이 그리스어 '아델포스'로 쓰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이미 신약성경 내부의 용례에서 아델포스가 친형제를 넘어선 용례로 명백한 구절들이 있기에, 이 단어를 셈족의 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즉, 개신교의 비판이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을 왜 확정된 교의로 가르치는가?"의 차원이라면 결국 '교회의 권위'라는 것에 대한 근본적 해석의 차이가 되겠으나, 마리아의 평생 동정이 성경의 본문과 충돌하지는 않는다. 동정 성모에 대한 이야기에서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은 요셉이다. 마리아의 남편인 [[나자렛의 요셉]]도 평생 동정을 지켰다는 전승이 [[가톨릭]] 전승이 있으나, 이것은 [[도그마]]가 아니다. 즉 믿든 말든 상관없다는 것. [[정교회]]에서는 복음서에 언급된 예수의 형제들은 요셉의 전처가 낳은 자식이고, 즉 마리아는 요셉의 후처라는 것을 믿는다. 정교회 전승대로라면 마리아와 요셉의 나이 차이는 상당했을 것이다. 요셉의 나이는 알수 없는데, 다만 여자와 달리 당시 유대인 남성은 가난하거나 토라를 배우는 학습시기이면, 조혼이 아닌 20세 무렵에도 결혼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http://www.ilculture.or.kr/culture/jew_history.php?page=1&mode=view&PGn=5&iKeyNum=8&strSkin=gallery_no&pgCode=&SVALUE=YToyOntzOjg6ImtleWZpZWxkIjtzOjc6InN1YmplY3QiO3M6Mzoia2V5IjtzOjA6IiI7fQ==&PHPSESSID=66acf9db383953f43a11ffb44bb3caa6|# 이스라엘 문화원]] 20세 무렵에 결혼해서 15년 후 사망이라 해도, 당시 의료 수준과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공생활 전에 사망했다 해도 어색하지는 않다. 요셉이 마리아와 재혼했다는 내용은 신약 외경 <야고보 복음서>에도 기록된 내용인데, 여기에 따르면 요셉은 마리아와 재혼할 당시 이미 나이가 '''80'''이었고, 이미 사별한 전처와의 사이에서 [[예수의 형제 야고보|야고보]], 유다, 시몬, 미리암 등의 자식이 있었으며, 그 중 야고보가 이 야고보 복음서를 저술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문헌은 현재 어느 그리스도교 종파에서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외경이기에, 정교회가 요셉이 마리아와 재혼했다는 전승을 받아들였다는 사실과는 별개지만, 정경 여부와는 별개로 2세기 중반 저술되었기에 참고 자료로는 가능하다. 2번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은 신약에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갈라 1,19)라고 언급되는 야고보이다. 이 야고보는 서방 교회 전례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사도 야고보와 동일 인물로 되어 있지만, 가톨릭 교의상으로는 동일 인물 유무가 확정된게 아니다. 아래에서는 알패오의 아들과의 '동일인물설'과 '별개인물설'을 각각 검토할 것이다. 우선 동일인물설이다. 다음은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형제를 언급하는 장면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마태 13, 55) >----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다음은 [[12사도]]의 명단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심당원|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태 10,1-4) >----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르 3,16-19) >----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루카 6,14-16) 다음은 십자가 곁의 여인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마태 27, 56) >----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마르 15,40) >----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 또한 유다 서간에는 다음 구절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가 부르심을 받은 이들,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 주시는 이들에게 인사합니다.(유다 1,1) 여기서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 요한 복음서, 유다 서간만 조합하여도,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 가능하다. ||1. 야고보와 유다와 요셉(=요세)은 예수의 형제로 불린다.(마르 6,3) 2. 야고보와 요셉(=요세)은 어머니가 같으며, 그녀는 성모 마리아의 동명이인 마리아이다.(마르 15,40)[* 이 구절에는 성모 마리아와 동명이인이라는 명시는 없지만, 그녀를 성모 마리아라고 가정한다면 복음사가가 "그분의 어머니"라 하지 않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한 것을 설명하기 힘들다.] 3. 요셉(=요세)의 형제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라 불린다.(마르 15,40) 4. 야고보와 유다 서간의 저자(로 내세워지는) 유다는 아버지가 같다.(유다 1,1) 5. 야고보의 아버지는 알패오이다(마태 10,3)[* 루카 복음서에는 유다 타대오가 '야고보의 아들'로 되어있지만 그리스 말 본문은 '야고보의 유다'라는 뜻이기에 반드시 부자 관계로 확정할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태 10,3) = 성모 마리아의 동명이인 마리아의 아들인 작은 야고보(마르 15,40) = 주님의 동생 야고보(갈라 1,19) = 유다 서간의 저자(라고 내세워지는) 유다의 형제 야고보(유다 1,1)가 되는 것이다. 추가로,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살로메를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로 본다.[[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237447|#]] 이를 받아들인다면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마르 15,40) =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요한 19,25)로[* 클로파스와 알패오의 관계에 대해서도 동일인물설과 별개인물설(작은 야고보의 어머니와 혼인한 별개의 두 인물로 보는 관점)이 있다.]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래 개신교 입장의 서술에선 >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갈라 2,9) 를 근거로 야고보가 예수의 친형제가 틀림없다고 하는데, 야고보가 케파보다 앞에 있는 것은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고, 혹은 유다파의 신자가 가장 신뢰하고 있던 사람이여서라고 볼 수도 있으며(2,12),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친척이라서 그렇다고 봐도 된다. 즉 갈라티아서를 인용하더라도 그것이 친형제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제 2번째로 살펴볼 것은, 알패오의 아들 사도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구분하는 별개인물설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이런 주장은 최근 들어 반론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열두 사도의 하나로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 >우선 사도행전 1장에서는 열두 사도와 예수님의 형제들을 완전히 구분합니다(1,12-14). [[바오로]] 사도도 야고보와 열두 사도를 구분합니다(1코린 15,5-7). 또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는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고 하는데 이때는 이미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뽑으신 후였습니다(3장). 나아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서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하는 말을 들으며 배척을 받으셨을 때에는 이미 사도로 뽑으신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였습니다(마르 6장). > >이런 반론을 따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야고보와 동일인이 아니라고 본다면, 우리는 사실상 야고보 사도에 대해서는 그가 알패오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 >[[http://maria.catholic.or.kr/sa_ho/board/board_view.asp?menugubun=saint&ctxtOrgNum=&ctxtOtherMenu=&ctxtOtherID=&ctxtSubMenu=basic&infogubun=info&orggubun=101&bbsgubun=pds&infoid=1750&bbscount=2&maingroup=&gubun=&seq=&group_id=&sub_id=&page=1&id=8225&table=gnattboard&user_auth=&RecHostcle=&getID=&getSeq=&Mode=&keyfield=&key=&ctxtHigh=&ctxtLow=|#]] > The author of the epistle identifies himself as "James" (1:1). Because several persons in the NT bear this name, it is necessary to settle on his identity by a process of elimination. Two men of this name were among the apostles of Jesus: James the son of Zebedee (Mk 1:19; 3:17) and James the son of Alphaeus (Lk 6:15; Acts 1:13). > >No doubt these figures possessed the requisite authority to instruct the Church in writing, but most scholars think it improbable that either one wrote the Letter of James—the former was martyred in A.D. 44, probably too early to have been the author (Acts 12:2), and very little is known about the latter beyond the fact of his enrollment among the Twelve. '''Instead, scholars through the centuries have given preference to a third figure of the apostolic age: James of Jerusalem, also known as "the Lord's brother" (Gal 1:19). This James was a kinsman of Jesus (Mk 6:3).''' He was also a witness to the Resurrection (1 Cor 15:7) and later became one of the "pillars" (Gal 2:9) of the earliest Christian community in Jerusalem (Acts 12:17; 15:13-21; 21:17-18). >---- >[[https://www.amazon.com/Ignatius-Catholic-Study-Bible-Testament/dp/1586172506/ref=sr_1_1?crid=2XPWOGPU1EUIJ&keywords=ignatius+catholic+study+bible&qid=1584531700&sprefix=The+Ignatius+Ca%2Caps%2C346&sr=8-1| 『The Ignatius Catholic Study Bible』]], INTRODUCTION TO THE LETTER OF SAINT JAMES >---- > The writer of the letter calls himself "Jude" (in Greek, Ioudas) and was known to his readers as the "brother of James" (Jude 1). Several persons mentioned in the NT share this popular Jewish name, including the early Christian prophet "Judas called Barsabbas" (Acts 15:22) and the two apostles "Judas the son of James" (Lk 6:16), also called "Thaddaeus" (Mk 3:18), and "Judas Iscariot" (Mt 10:4; Lk 6:16). > >Though some have attributed the letter to the first or second of these figures, and others have declared him to be otherwise unknown, the majority of scholars identify the author with still another "Judas", who is listed in the Gospels as one of the four kinsmen of Jesus (Mt 13:55; Mk 6:3). This is the only Judas in the NT who is known to have had a brother named James. This also explains how readers could be expected to identify the author simply by the mention of his brother's name. '''James, after all, was a prominent figure in apostolic times as the leader of the Jerusalem Church following the departure of Peter from the city (Acts 12:17; 15:13; 21:18). He was popularly known as "the Lord's brother" (Gal 1:19).''' >---- >[[https://www.amazon.com/Ignatius-Catholic-Study-Bible-Testament/dp/1586172506/ref=sr_1_1?crid=2XPWOGPU1EUIJ&keywords=ignatius+catholic+study+bible&qid=1584531700&sprefix=The+Ignatius+Ca%2Caps%2C346&sr=8-1| 『The Ignatius Catholic Study Bible』]], INTRODUCTION TO THE LETTER OF SAINT JUDE >야고보 서간은 당시의 서한체 관례에 따라 첫머리에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힌다.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1,1). 여기서 야고보는 누구를 말하는가? 예수님의 제자인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인 야고보(이른바 장{{{-4 長}}} 야고보: 마르 1,19)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다른 제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차{{{-4 次}}}야고보: 마르 3,18)인가? 그도 아니면 나중에 교회 전승에서 밝힌(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 II.23.4) 주님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원로단의 대표가 된 야고보(사도 12,17; 15,13; 1코린 15,7; 갈라 1,19; 2,9.12)인가? 야고보서가 저자로 내세운 이 인물은 십중팔구 마지막 야고보일 가능성이 높다. 우선 요한의 형 야고보는 40년대 초에 순교하였고(사도 12,1-2),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 >한님성서연구소, 『성서 입문 : 하권』, 정태현, 2018년 6쇄, 교회인가 2008, 663-664쪽[* 이하『성서 입문 : 하권』] >Beside the figure of James the Greater, son of Zebedee, of whom we spoke last Wednesday, another James appears in the Gospels, known as "the Lesser". He is also included in the list of the Twelve Apostles personally chosen by Jesus and is always specified as "the son of Alphaeus" (Mt 10:3; Mk 3:18; Lk 5; Acts 1:13). '''He has often been identified with another James, called "the Younger" (cf. Mk 15:40), the son of a Mary (cf. ibid.), possibly "Mary the wife of Clopas", who stood, according to the Fourth Gospel, at the foot of the Cross with the Mother of Jesus (cf. Jn 19:25).''' > >He also came from Nazareth and was probably related to Jesus (cf. Mt 13:55; Mk 6:3); according to Semitic custom he is called "brother" (Mk 6:3; Gal 1:19). > >The book of the Acts of the Apostles emphasizes the prominent role that this latter James played in the Church of Jerusalem. At the Apostolic Council celebrated there after the death of James the Greater he declared, together with the others, that pagans could be received into the Church without first submitting to circumcision (cf. Acts 15:13). St. Paul, who attributes a specific appearance of the Risen One to James (cf. 1 Cor 17:7), even named James before Cephas-Peter on the occasion of his visit to Jerusalem, describing him as a "pillar" of that Church on a par with Peter (cf. Gal 2:9). > >Subsequently, Judeo-Christians considered him their main reference point. The Letter that bears the name of James is also attributed to him and is included in the New Testament canon. In it, he is not presented as a "brother of the Lord" but as a "servant of God and of the Lord Jesus Christ (Jas 1:1). > >'''Among experts, the question of the identity of these two figures with the same name, James son of Alphaeus and James "the brother of the Lord", is disputed. With reference to the period of Jesus' earthly life, the Gospel traditions have not kept for us any account of either one of them.''' >---- >[[베네딕토 16세]] [[https://www.ewtn.com/catholicism/library/james-the-lesser-6286|#]] 즉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태 10,3) ≠ 성모 마리아의 동명이인 마리아의 아들인 작은 야고보(마르 15,40)[* 정태현 신부는 알패오의 아들을 次야고보로 말하고 [[베네딕토 16세]]는 the Lesser로 말하지만, 또한 베네딕토 16세는 the Lesser와 the Younger(마르 15,40)를 구분해서 말하므로 혼동에 주의] = 주님의 동생 야고보(갈라 1,19) = 유다 서간의 저자(라고 내세워지는) 유다의 형제 야고보(유다 1,1)로 보는 것도 가톨릭에서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위 발췌문 중 사도 명단을 말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님의 동생 야고보=작은 야고보'에 대한 구절이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보더라도 위의 논리 전개에서 ||1. 야고보와 유다와 요셉(=요세)은 예수의 형제로 불린다.(마르 6,3) 2. 야고보와 요셉(=요세)은 어머니가 같으며, 그녀는 성모의 동명이인 마리아이다.(마르 15,40) 3. 요셉(=요세)의 형제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라 불린다.(마르 15,40) 4. 야고보와 유다 서간의 저자(로 내세워지는) 유다는 아버지가 같다.(유다 1,1) ~~5. 야고보의 아버지는 알패오이다(마태 10,3)~~|| 이렇게만 달라질 뿐, 근본적인 의문인 '형제라는게 친형제를 뜻하는가?'에는 여전히 '그렇다'는 단정이 불가능하며, 특히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요한 19,25)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마르 15,40)를 동일 인물로 본다면, 주님의 동생 야고보의 어머니는 성모의 동명이인 마리아이며 아버지는 클로파스라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또한 클로파스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마르코 15장 40절의 '마리아', 곧 요세와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는 성모가 아니다. 그녀를 성모라고 가정한다면 복음사가가 "그분의 어머니"라 하지 않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한 것을 설명하기 힘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